​몽타주는 심장박동이다. - 글 김수정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큼 새삼스러운 것이 있을까. 언젠가부터 ‘그림 같은 풍경’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감동과 감화를 주는 대상에서 탈락해 고색창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도로를 달리는 내내 푸른 능선을 볼 수 있는 강원도로 여행을 온 사람이 경탄하며 감상하는 실재와, 같은 배경일지라도 화이트큐브에 멀쑥하게 걸려있는 것을 보고 진부함을 느끼는 경우처럼 말이다. 감응은 상대와 나와의 연결지점이 있어야 생기는 정직한 작용이고 평범한 풍경을 담은 ‘이미지’는 더 이상 감응의 트리거가 되지 못한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은 (결국 도시로 돌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실은 자연 자체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지 않은 모니터나 전시장에서 납작한 상태로 보는 것이 구태의연했던 것이다.

모두와 함께 산으로 들어온 것은 지난 9월의 일이다. 또래 기획자들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자연에서 함께 먹고 자고 듣고 보고 만드는 국제 레지던시를 진행한다고 열여섯나라의  뮤지션과 무용수, 시각 예술가 20인을 초대했다. 문화올림픽 사업의 일환이기에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 소재의 감자꽃 스튜디오가 우리의 판이 되었다. 올림픽은 주최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가치를 단기간에 도약시킬 수 있는 범국가적인 호기이므로 게임이 열리는 강원도(평창, 강릉, 정선) 어귀마다 올림픽 광고판과 마스코트가 설치되어 개최 전의 기대감을 가득 풀어놓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스튜디오는 얽히고 설킨 이야기가 없는 그저 산에 둘러싸인 조용한 창작촌이었고 우리들이 공동체로서, 또 단일 예술가로서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호젓한 환경이 되어주었다.

20인의 집단은 산이 좋아서, 지역의 사회 현상이 궁금해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혹은 고국에 돌아오기 위해서 와 같은 개별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작과 협업을 기대하며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각자가 바라보는 목표와 그에 대한 작업태도가 달랐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폭발적인 협업 세션도, 우연한 영감과 발견도 있었다. 물론 산속에 있다 보니 접근성 문제로 고생도 많았다. 초반에는 서로가 발하는 다이내믹한 스펙트럼에 경도되어 버리기도 하고 그들과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면서 시행착오도 겪었다. 수행성에 과하게 치우쳐 있다가 작업에 대한 근거나 당위성을 쉽게 간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이 만남의 순간에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 나오든 간에 일단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주어진 창작 기간은 30일이 조금 넘었다. 즉각적인 표현에 익숙한 공연 예술가들(뮤지션, 무용수들)과는 달리, 개념의 구현이라는 시간-소비적인 사명에 익숙한 시각예술 작가들은 짧은 작업 기간에 대해 날카롭게 인지하고 무엇을 할지 사전에 계획해 왔다. 물론 그 계획은 실제 환경에 던져지면서, 주위를 관찰하면서, 예기치 않은 발견과 영감이 뒤따르면서 방향도 주제도, 미디엄도 수정되었다. 작업의 선택지를 두고 벌인 토론과 비평의 시간은 현실을 낭만화하거나 장식화하지 않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우리의 전시는 마감에 맞춰 달려온 아쉬운 완결 상태로, 혹은 전하려 했던 이야기가 조금 엉켜있는 채로 관객을 맞는다.

전시 타이틀은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가 영화의 미장센과 몽타주 기법에 대해 쓴 에세이 중 한 문장인 “연출이 하나의 장면이라면 몽타주는 심장박동이다.(If direction is a look, montage is a heartbeat)”에서 빌려왔다. 몽타주는 모으다, 조합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필름의 단편을 조합하여 내러티브를 만드는 영화 기법으로 통용된다. 이 전시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인연을 맺고 헤어지게 되는 레지던시의 필연적인 여정과 각기 다른 작업 전개를 보여준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호흡을 몽타주로 제시하고자 한다. 정체성, 환경, 현재성을 다루는 각 작가들의 단편적인 작업들은 동료 작가의 작업과 긴밀히, 혹은 아이러니하게 연결되어 다각적인 해석을 낳는 일련의 사건(시퀀스)(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다.

20인의 아티스트가 만나 빠르고 뜨겁게 작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대책 없이 ‘자연적인’ 환경 속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사람과 주변 현상 이외 다른 스펙타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외딴 환경이 제한을 만들었고 그 제한 안에서 이들은 두근거림, 긴장, 갈등, 놀라움, 다정함, 오해, 감사, 그리고 일상이 소용돌이치는 작은 사회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이들 작업에 대한 몽타주-조합은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을 상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시를 보러 온 이들은 예술가이자 사회적인 존재(social being)로서 낯선 커뮤니티의 일원이 된 아티스트들이 스스로 상정한 다양한 페르소나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욕망과 실천의 단편 속에 그때 산 아래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올려다보았던 오후 5시 45분의 찬란한 빛이 존재한다.